두 제자의 이야기 : 유다와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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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묵상 에세이 · Lenten Reflection 두 제자의 이야기 :  유다 와 베드로 배반, 절망, 그리고 방향에 관하여 ✦ 프롤로그 같은 밤, 두 사람 그 밤은 같은 밤이었다. 예루살렘의 어둠은 두 사람을 동시에 감쌌다. 한 사람은 은전 서른 닢을 손에 쥐고 대제사장들에게 돌아갔고, 또 한 사람은 뜰 한가운데 불 곁에 서서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고 말했다. 유다와 베드로. 둘 다 예수를 배반했다. 그러나 역사는 두 사람을 전혀 다른 이름으로 기억한다. 왜일까. 단순히 한 사람은 나쁘고, 한 사람은 착해서일까? 아니면 그 안에 우리가 아직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첫 번째 이야기 유다의 후회 — 그것은 정말 회개였을까? 성경은 유다가 예수의 사형 선고를 보고 "뉘우쳤다"고 기록한다. 그는 은전을 성전에 던지며 외쳤다. "내가 죄 없는 피를 팔았다." 얼핏 보면 이것은 회개처럼 들린다. 잘못을 인정하는 고백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말을 천천히 다시 읽어보자. "죄 없는 피." 유다는 예수가 무고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식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깨달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계산이 틀렸다는 인식에 가까웠다. 유다의 절망은 진리 앞에서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시나리오가 완전히 빗나간 것에 대한 공황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유다가 예수를 판 이유를 단순한 탐욕으로 설명한다. 물론 은전 서른 닢이 개입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더 깊이 들여다보면, 유다는 어쩌면 자신만의 메시아상을 그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로마에 맞서 일어설 혁명적 지도자. 새 왕국에서 자신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시대. 배반은 예수를 '강제로 행동하게 만들려는' 마지막 도박이었을 수도 ...

디지털 인텔리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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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공지능 (AI)와 함께 디지털 인텔리전스라는 용어가 최근 들어 자주 거론되고 있다. AI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통합적인 시스템을 의미하는 개념이지만, 기술이나 사회의 발전의 과정에서 본다면 자연스러운 확장이다. 물리학에서 에너지 실체와 법칙을 발견하고 그 본질을 파헤지면서 이를 활용하려는 사람들의 열정 어린 탐구와 도전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첨단 문명의 핵을 이루는 요소들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학의 발전 과정에서 현재까지도 풀지 못하고 있는 개념의 양면성이 입자설과 파동설이다.  디지털 인텔리전스에 대비되는 개념은 아날로그 인텔리전스이다. 디지털 인텔리전스를 입자로 이루어지는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라면 아날로그 인텔리전스는 파동으로 이루어지는 세계를 말한다. 사람들은 무언가 확실하게 구분하여야만 마음이 편하다. 물리학에서는 전혀 다른 두 개가 동시에 하나로 존재할 수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기껏해야 불확정성의 원리니 양자 얽힘 혹은 중첩으로 대충 마무리하고는 있지만, 왜 그런지는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전혀 다른 개념의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동시에 상존하는 상보성의 원리를 단순한 원리가 아니라 그 본질을 파헤지고 정의하고 나아가 활용하는 시대가 올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어떤 방법으로 그리고 어떤 방향에서 지능을 정의해야만 할 것인지 먼저 생각해 보아야만 할 것이다.

메타인지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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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공지능 시대에 메타인지가 정말 중요할까? 지성과 감성의 발달과 기능의 향상으로는 인공지능 시대에 자신의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찾는 것에 실패할 것이다. 아마도 최고 성능의 인공지능이 조언하는 존재의 이유에 만족할지도 모른다. 그러한 결과는 인간의 모든 고귀한 특성을 포기하고 단지 완벽하게 행복한 물질적 삶에 주저없이 동의하는 것이다. 그런 삶이라면, 동물과는 전혀 다른, 존엄성을 가진 인간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인가?   삶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예술가, 음악인, 철학자, 과학자, 교육자, 심지어 공무원과 기술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의  수많은 사람들이 창의력과 도전 정신으로 새로운 장을 열어가면서 세상을 만들고 있다. 창의력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을 앞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세상을 새롭고 활기차게 만드는 핵심은 인간만이 주도할 수 있는 도전이다.   도전은 정신이다. AI가 언젠가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정신은 결코 가질 수 없다. 도전은 크기에 상관없이 내용이 무엇이건 아무리 사소해도 인간다운 것이다. 그것은 메타인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도전 의식이 사리지는 순간, 사람은 인간에서 고등동물군으로 신분이 추락하는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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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감을 설명할 때 종종 예시되는 말이다. 바닥에서 시작하여 성공한 사람이 세상에 대한 고마움을 행동으로 표현하면서 당연히 되돌려야 할 책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아름답다. 그러나 대대로 상속되는 특권이나 운빨로 얻은 부를 누리면서 세상에 대한 미안함으로 말하는 오블리주는 스스로에 대한 정당성을 의식해보려는 술책이자 가문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변호하는 위장된 겸손이다.   특권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정당한 특권을 남을 위하여, 특히 세상을 위하여 아낌없이 포기하는 것은 위인이나 영웅이 아니고는 거의 불가능하다. 대부분은 자신의 위상이 혹시라도 공격을 받거나 박탈되는 불상사를 미리 방지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예방 차원에서 지혜를 짜내며 지키려고 한다. 그것은 나쁜 일은 아니다, 그저 자연적인 본성이다.   자수성가한 사람이 특권을 공공연히 자랑하고 즐기는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자극이 되고 도전의 동기가 되기에 장려되어야만 한다. 그럴 때의 오블리주는 말만 들어도 향기롭다. 그 반대라면, 고상한 헌신도 냄새가 날 수 있다.  저절로 향기를 뿜는다면 꽃이다. 꽃은 아름답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영롱한 모습 때문이지만 꽃을 사랑하는 것은 꽃이 지면서 또 다른 곳에서 새롭게 피어나도록 세상에 언제까지나 이어지기 때문이다. 꽃은 스스로 자랑하지도 겸손하지도 않다. 존재하는 것으로 증명되고 열심히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    

니체와 바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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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최초의 출간이자 스스로 완벽한 저술이라고 말한  《비극의 탄생》에서 철학과 예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소개했었는데, 자신이 주장한 ' 디오니소스적이고 아폴론적인 삶'의 서사를 완벽하게 균형을 이룬 작품이 바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이라고 극찬했다.  니체는 이 오페라에 등장하는 트리스탄 화음 (Tristan Chord)을 긴장과 갈망의 극치를 표현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바그너를 좋아했는데, 나중에는 '내가 한때 미쳐서 그런 배반자를 찬양했다'라고 격하게 혐오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쌍욕으로 가득한 그에 대한 책을 썼을까? 아무튼 니체가 '살아있는 디오니소스'라고 추앙했던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12월 4일 예술의 전당에서 관람하기로 했다. 6시간의 공연이니 따분한 모습을 감추기는 쉽지 않을 것이지만, 니체와 바그너의 명성이 지루함을 어느 정도 막아주리라 기대된다.

블로그 시작

늘 남의 글을 읽기만 하다가, 막상 블로그를 만들고 보니, 뭐 하려 했나 싶은 생각이 든다. 글을 쓸만한 능력도 아니고 마땅히 쓸만한 주제도 별로 없는 데, 무심코 덜컥 블로그를 만드는 바람에 괜히 부담스러운 일을 저지른 느낌이다.  세상 일이나 사람의 일이나 타자를 비판하고 은근히 공격하는 것은, 누구나 한결같이 신나게, 열심히, 언제, 어디서나, 주제와 분야에 관계없이 아주 쉽게 즐기는 일이라서 그런 것부터 시작할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 내 체면을 깎는 일이라서 피하고 싶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하지 말거나 피해야 될 것이 무엇인지 정하는 것부터 적게 된다.